수원과 안양의 지지대 더비
2009/12/29 10:34
◇운명의 99년,'지지대더비'를 만들어낸 두가지 사건이 동시에 터지다.◇
삼성전자는 95년 축구단을 만들기로 하고 '94 미국월드컵의 명장 김호 감독을 초대 사령탑으로 영입해 창단 준비에 들어갔다. 96년 수원을 연고지로 K리그 9번째 구단이 탄생하던 순간 전해까지 서울을 공동연고지로 삼고 있었던 LG는 안양으로 '이사'를 오게됩니다.
LG를 비롯 일화 유공 등 3개팀은 서울을 공동 연고지로 삼고 있었지만 프로축구연맹의 지방축구와 연고지 활성화 프로젝트에 따라 수도를 떠나야만 했고 LG는 모기업의 기반이 있는 창원으로 옮기는 것을 검토했지만 안양시가 적극적으로 축구단 유치에 나서 수도권의 이점과 향후 서울 재입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결국 안양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96년 시즌 수원과 안양은 '이웃 사촌'으로 K리그를 새롭게 시작하게됩니다
그러나 96년부터 98년까지 3년 동안에는 지금 축구팬들이 생각하는 뜨거운 분위기의 '지지대더비'는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갓 창단한 수원이나 새로운 연고지에 적응해야 하는 안양이나 일단 각자 자립의 틀과 기반을 만들어내는 것이 더 시급한 과제였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안양을 이끌었던 조영증(96년),박병주(97~98년) 감독이 수원의 김호 감독과 별다른 경쟁의식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도 한 요인이었다.
그런 가운데 '클래식 더비'가 탄생할 외부적 분위기는 서서히 달아오르고 있었는데... 95년 겨울 사상 첫 프로축구단 서포터스인 그랑블루가 출범했고 이듬해 안양의 지지자 모임인 레드가 닻을 올렸다. 서포터스 사이의 라이벌 구도가 형성되는 초창기였다. 또한 98년 프랑스월드컵이 끝난뒤 이른바 '프로축구의 르네상스'가 만개했고 신세대 관중들이 경기장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운명의 99년,드디어 수원과 안양이 서로를 최고의 라이벌로 적대시할만한 사건이 연이어 벌어졌다. 우선 안양 사령탑으로 조광래 감독이 부임했다. 조 감독은 김호 감독이 수원의 창단 사령탑으로 부임했을 때 수석코치로 그를 보좌했다. 김호가 '수원의 아버지'였다면 조광래는 '수원의 어머니'라고 평가할 만했다. 그런 조 감독이 안양을 맡게 되면서 두팀 사이에는 전운이 감돌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길고 긴 인연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설명하겠다.
시즌 개막을 앞두고는 안양이 자랑하던 최고 스타 서정원이 수원으로 말을 갈아타는 사건이 터졌다. 92년부터 97년까지 안양(LG)에서 뛰던 서정원은 프랑스리그 스트라스부르에서 '세오(Seo)' 열풍을 일으키다가 99년 K리그에 복귀하면서 친정대신 수원에 전격 입단했다. 이 충격적인 사건은 두 구단 프런트 사이에 넘어설 수 없는 감정의 골을 깊게 만들었다. 당시 절정의 기량을 뽐내던 서정원을 얻은 수원팬들은 열광했고,반면 안양팬들은 서정원의 유니폼 화형식을 하면서 분개했다. 99년은 이렇게 시작됐다.
◇김호와 조광래의 5년전쟁은 뜨거웠다.◇
99년부터 2003년까지 벌어졌던 수원-안양의 '지지대더비'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김호와 조광래의 '5년 전쟁'이었다. 김호와 조광래의 얽히고 설킨 실타래를 설명하지 않고서는 수원과 안양의 라이벌 관계를 이해할 수 없다.
통영 출신인 김호와 진주에서 태어난 조광래는 경남이 배출한 대표적인 축구인이였다. 10년 차이가 나는 두 사람은 함께 국가대표 생활을 할 기회는 없었지만 축구철학에 대해서는 상당 부분을 공유했다. 조 감독은 "젊은 시절부터 김 감독하고 이야기를 나누면 그냥 말이 통했다.
한국축구가 나아갈 방향이나 팀을 어떻게 만들어갈지에 대한 생각이 상당히 비슷했다"고 털어놨다. 김호가 92년 처음으로 도입된 국가대표팀 전임감독 1호로 선임됐을 때 조광래는 코치로 도왔다. 당시 기술위원회는 투표로 감독을 선임했는데 '김호 조광래 카드'가 성사되면서 김호는 투표전에서 이길 수 있었다. 이런 인연은 수원 창단때 까지 이어졌다.
김호가 수원의 초대 사령탑으로 창단 작업을 진행할 때 조광래가 코치로 합류했다. 조광래는 이미 92~94년에 대우 감독을 역임한 상태였다. 프로팀 감독을 했던 사람이 다른 팀의 코치로 간 경우는 그 때가 처음이었다. 그만큼 김호와 조광래는 단단한 밀월관계를 유지했다. 당시 축구계에서는 김호와 조광래가 '대권'을 주고받는 약속을 했다는 설이 떠돌았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고 했던가. 97시즌이 끝나고 조광래는 수원을 떠났다. 당연히 김호와의 불화설이 나돌았고,두 사람 사이가 '감정적으로 끝장났다'는 얘기가 축구계에 파다했다. 98년 말 조광래가 안양의 감독으로 K리그에 복귀했다. 조광래의 제1목표는 '타도 수원(김호)'이였다.
99년 안양은 수원과 4번 맞붙어 1승3패로 열세였다. 99년은 수원이 두번째 K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가장 강력한 스쿼드를 뽐내던 시기였다. 조 감독은 "내가 안양을 처음 맡았을 때 팀은 중하위권 수준이었다.
이 전력으로 수원에게 도저히 이기기 힘들었다. 그래서 수원을 창단하면서 만들었던 훈련프로그램을 똑같이 안양에 적용했다. 수원을 이기지 못하더라도 경기 내용은 대등하게 갖고 가겠다,좋은 경기를 하겠다는 확실한 목표가 있었다"고 회고했다. '수원을 만들던 방식으로 안양을 재구성하겠다'는 조광래의 전술을 적중했다. 이듬해 안양은 1년만에 수원을 상대로 4승1패의 놀라운 대반전을 일으켰고,내친김에 K리그 우승컵까지 거머쥐었다.
2000년 4월 9일 수원종합경기장에서 벌어졌던 양팀의 대결은 '5년 전쟁'의 하이라이트로 꼽힐만 하다. 수원이 5-4로 승리했는데 골을 주고받는 과정이 너무 극적이었다. 전반16분 안양 정광민이 선제골을 넣자 1분뒤 수원 데니스가 동점을 만들었고 다시 2분뒤 안양 안드레가 골을 넣어 앞서나갔다.
1분뒤 수원 비탈리의 골로 균형이 맞춰지는가 했지만 6분뒤 안드레가 또다시 네트를 흔들어 리드를 잡았고 2분뒤 수원 데니스는 끝내 세번째 동점을 만들어냈다. 불과 12분 사이에 폭죽처럼 6골을 주고받으며 3-3으로 전반을 끝낸 명장면은 그 전에도,이 후에도 K리그에 없었다.
후반들어 수원은 이경우가 3분과 41분 연속골을 터트리며 확실한 리드를 잡았지만 42분 안드레의 해트트릭 골이 성공되면서 다시 상황은 5-4가 됐고 양팀 벤치는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끝내 추가골은 터지지 않고 대격전은 마무리됐다.
그리고 3년뒤 2003년 10월 8일 마지막 지지대더비가 안양종합경기장에 벌어졌고
경기내내 주도권을 잡고있던 안양은 박요셉의 선취골로 앞서나갔다.
그렇게만 끝날줄 알았던 경기는 경기종료직전 나드손이 2분의기적을 일으키며
믿기지않는 역전승을 이끌내면서 경기는 종료됐고 지지대더비는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이경기는 아직도 수원팬들사이에서 회자될정도로 최고의 명승부로 기억되고 있다.
수원과 안양의 경기에서 무승부가 거의 없었던 것도 김호와 조광래의 스타일을 반영한 결과였다. 미드필드를 강조하고,수비보다는 공격을 추구하는 전술로 두 사람은 숱한 명승부를 연출해냈다
조광래 감독은 "수원 시절부터 어린 선수를 키워야 한국축구가 한단계 업그레이드된다는 생각은 확고했다. 안양으로 옮긴뒤 수원에서 구상했던 유망주 육성 프로젝트를 그대로 실현했다"고 말했다.
안양과 수원에서 경쟁적으로 키워낸 수많은 유망주들은 오랜 기간 국가대표팀과 올림픽대표팀의 주축이 됐다. 김호 감독은 "수원과 안양이 펼친 선의의 경쟁이 한국축구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고 평가했다.
'김호의 수원'과 '조광래의 안양'은 99년부터 2003년까지 5년동안 K리그에서 21번을 맞붙어 10승1무10패를 기록했다. 말그대로 용호상박의 혈투였다. 2003년 시즌이 끝난뒤 김호는 수원을 떠났고,안양은 다시 서울로 연고를 옮겨 FC서울로 재탄생했다. 그렇게 K리그에 가장 치열했던 라이벌전으로 기억되는 수원과 안양의 '5년 전쟁'은 막을 내렸다.
◇'1번 국도 더비'의 추억 ◇
그랑블루의 창단멤버이지 지금은 수원에서 프런트로 일하고 있는 이은호씨의 기억은 각별하다. "그랑블루는 국내 최초의 서포터스라는 자부심이 대단했어요. 양질에서 최고라는 믿음이 있었지요. 그러나 늦게 만들어진 안양 서포터스 '레드'에 자극받은 측면도 큽니다. 당시 '레드'에는 예술가 취향의 멤버들이 많았어요. 미대 출신들이 큰 통천에 직접 수작업으로 멋진 그림을 그렸고,밴드 출신들이 락음악풍의 응원가를 만들기도 했지요. 레드의 그런 예술적 취향은 그랑블루에도 신선한 자극이 됐고,두 서포터스가 서로 경쟁하며 발전하는 계기가 됐어요".
당시 수원과 안양을 직접 잇는 버스노선이 없어서 양팀 팬들이 차량을 이용해 이동했는데 1번 국도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양팀 서포터스 사이에는 수원-안양전이 '1번 국도 더비'로 통했다. 이씨는 "아마도 두 팀의 경기가 끝난뒤 조용하게 지나간 적이 한번도 없었을 거예요. 서포터스끼리 크고 작은 뒤탈이 꼭 있었죠. 그래도 두 팀 서포터스는 원래 '붉은 악마'안에서 사이가 좋았던 그룹"이라고 회상했다. 안양이 서울로 연고를 옮긴뒤 두 팀간의 라이벌 의식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지만 '김호의 수원'과 '조광래의 안양'이 붙었을 때의 클래시컬한 맛은 분명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다.
◇수원팬 대부분은 서울을 라이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최고의 경쟁자이자 라이벌이였던 안양을 앗아간 증오의 대상일뿐이죠.
수원블루윙즈 지지자연대 그랑블루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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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패는 북패일 뿐이고
삼성전자는 95년 축구단을 만들기로 하고 '94 미국월드컵의 명장 김호 감독을 초대 사령탑으로 영입해 창단 준비에 들어갔다. 96년 수원을 연고지로 K리그 9번째 구단이 탄생하던 순간 전해까지 서울을 공동연고지로 삼고 있었던 LG는 안양으로 '이사'를 오게됩니다.
LG를 비롯 일화 유공 등 3개팀은 서울을 공동 연고지로 삼고 있었지만 프로축구연맹의 지방축구와 연고지 활성화 프로젝트에 따라 수도를 떠나야만 했고 LG는 모기업의 기반이 있는 창원으로 옮기는 것을 검토했지만 안양시가 적극적으로 축구단 유치에 나서 수도권의 이점과 향후 서울 재입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결국 안양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96년 시즌 수원과 안양은 '이웃 사촌'으로 K리그를 새롭게 시작하게됩니다
그러나 96년부터 98년까지 3년 동안에는 지금 축구팬들이 생각하는 뜨거운 분위기의 '지지대더비'는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갓 창단한 수원이나 새로운 연고지에 적응해야 하는 안양이나 일단 각자 자립의 틀과 기반을 만들어내는 것이 더 시급한 과제였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안양을 이끌었던 조영증(96년),박병주(97~98년) 감독이 수원의 김호 감독과 별다른 경쟁의식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도 한 요인이었다.
그런 가운데 '클래식 더비'가 탄생할 외부적 분위기는 서서히 달아오르고 있었는데... 95년 겨울 사상 첫 프로축구단 서포터스인 그랑블루가 출범했고 이듬해 안양의 지지자 모임인 레드가 닻을 올렸다. 서포터스 사이의 라이벌 구도가 형성되는 초창기였다. 또한 98년 프랑스월드컵이 끝난뒤 이른바 '프로축구의 르네상스'가 만개했고 신세대 관중들이 경기장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운명의 99년,드디어 수원과 안양이 서로를 최고의 라이벌로 적대시할만한 사건이 연이어 벌어졌다. 우선 안양 사령탑으로 조광래 감독이 부임했다. 조 감독은 김호 감독이 수원의 창단 사령탑으로 부임했을 때 수석코치로 그를 보좌했다. 김호가 '수원의 아버지'였다면 조광래는 '수원의 어머니'라고 평가할 만했다. 그런 조 감독이 안양을 맡게 되면서 두팀 사이에는 전운이 감돌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길고 긴 인연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설명하겠다.
시즌 개막을 앞두고는 안양이 자랑하던 최고 스타 서정원이 수원으로 말을 갈아타는 사건이 터졌다. 92년부터 97년까지 안양(LG)에서 뛰던 서정원은 프랑스리그 스트라스부르에서 '세오(Seo)' 열풍을 일으키다가 99년 K리그에 복귀하면서 친정대신 수원에 전격 입단했다. 이 충격적인 사건은 두 구단 프런트 사이에 넘어설 수 없는 감정의 골을 깊게 만들었다. 당시 절정의 기량을 뽐내던 서정원을 얻은 수원팬들은 열광했고,반면 안양팬들은 서정원의 유니폼 화형식을 하면서 분개했다. 99년은 이렇게 시작됐다.
◇김호와 조광래의 5년전쟁은 뜨거웠다.◇
99년부터 2003년까지 벌어졌던 수원-안양의 '지지대더비'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김호와 조광래의 '5년 전쟁'이었다. 김호와 조광래의 얽히고 설킨 실타래를 설명하지 않고서는 수원과 안양의 라이벌 관계를 이해할 수 없다.
통영 출신인 김호와 진주에서 태어난 조광래는 경남이 배출한 대표적인 축구인이였다. 10년 차이가 나는 두 사람은 함께 국가대표 생활을 할 기회는 없었지만 축구철학에 대해서는 상당 부분을 공유했다. 조 감독은 "젊은 시절부터 김 감독하고 이야기를 나누면 그냥 말이 통했다.
한국축구가 나아갈 방향이나 팀을 어떻게 만들어갈지에 대한 생각이 상당히 비슷했다"고 털어놨다. 김호가 92년 처음으로 도입된 국가대표팀 전임감독 1호로 선임됐을 때 조광래는 코치로 도왔다. 당시 기술위원회는 투표로 감독을 선임했는데 '김호 조광래 카드'가 성사되면서 김호는 투표전에서 이길 수 있었다. 이런 인연은 수원 창단때 까지 이어졌다.
김호가 수원의 초대 사령탑으로 창단 작업을 진행할 때 조광래가 코치로 합류했다. 조광래는 이미 92~94년에 대우 감독을 역임한 상태였다. 프로팀 감독을 했던 사람이 다른 팀의 코치로 간 경우는 그 때가 처음이었다. 그만큼 김호와 조광래는 단단한 밀월관계를 유지했다. 당시 축구계에서는 김호와 조광래가 '대권'을 주고받는 약속을 했다는 설이 떠돌았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고 했던가. 97시즌이 끝나고 조광래는 수원을 떠났다. 당연히 김호와의 불화설이 나돌았고,두 사람 사이가 '감정적으로 끝장났다'는 얘기가 축구계에 파다했다. 98년 말 조광래가 안양의 감독으로 K리그에 복귀했다. 조광래의 제1목표는 '타도 수원(김호)'이였다.
99년 안양은 수원과 4번 맞붙어 1승3패로 열세였다. 99년은 수원이 두번째 K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가장 강력한 스쿼드를 뽐내던 시기였다. 조 감독은 "내가 안양을 처음 맡았을 때 팀은 중하위권 수준이었다.
이 전력으로 수원에게 도저히 이기기 힘들었다. 그래서 수원을 창단하면서 만들었던 훈련프로그램을 똑같이 안양에 적용했다. 수원을 이기지 못하더라도 경기 내용은 대등하게 갖고 가겠다,좋은 경기를 하겠다는 확실한 목표가 있었다"고 회고했다. '수원을 만들던 방식으로 안양을 재구성하겠다'는 조광래의 전술을 적중했다. 이듬해 안양은 1년만에 수원을 상대로 4승1패의 놀라운 대반전을 일으켰고,내친김에 K리그 우승컵까지 거머쥐었다.
2000년 4월 9일 수원종합경기장에서 벌어졌던 양팀의 대결은 '5년 전쟁'의 하이라이트로 꼽힐만 하다. 수원이 5-4로 승리했는데 골을 주고받는 과정이 너무 극적이었다. 전반16분 안양 정광민이 선제골을 넣자 1분뒤 수원 데니스가 동점을 만들었고 다시 2분뒤 안양 안드레가 골을 넣어 앞서나갔다.
1분뒤 수원 비탈리의 골로 균형이 맞춰지는가 했지만 6분뒤 안드레가 또다시 네트를 흔들어 리드를 잡았고 2분뒤 수원 데니스는 끝내 세번째 동점을 만들어냈다. 불과 12분 사이에 폭죽처럼 6골을 주고받으며 3-3으로 전반을 끝낸 명장면은 그 전에도,이 후에도 K리그에 없었다.
후반들어 수원은 이경우가 3분과 41분 연속골을 터트리며 확실한 리드를 잡았지만 42분 안드레의 해트트릭 골이 성공되면서 다시 상황은 5-4가 됐고 양팀 벤치는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끝내 추가골은 터지지 않고 대격전은 마무리됐다.
그리고 3년뒤 2003년 10월 8일 마지막 지지대더비가 안양종합경기장에 벌어졌고
경기내내 주도권을 잡고있던 안양은 박요셉의 선취골로 앞서나갔다.
그렇게만 끝날줄 알았던 경기는 경기종료직전 나드손이 2분의기적을 일으키며
믿기지않는 역전승을 이끌내면서 경기는 종료됐고 지지대더비는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이경기는 아직도 수원팬들사이에서 회자될정도로 최고의 명승부로 기억되고 있다.
수원과 안양의 경기에서 무승부가 거의 없었던 것도 김호와 조광래의 스타일을 반영한 결과였다. 미드필드를 강조하고,수비보다는 공격을 추구하는 전술로 두 사람은 숱한 명승부를 연출해냈다
조광래 감독은 "수원 시절부터 어린 선수를 키워야 한국축구가 한단계 업그레이드된다는 생각은 확고했다. 안양으로 옮긴뒤 수원에서 구상했던 유망주 육성 프로젝트를 그대로 실현했다"고 말했다.
안양과 수원에서 경쟁적으로 키워낸 수많은 유망주들은 오랜 기간 국가대표팀과 올림픽대표팀의 주축이 됐다. 김호 감독은 "수원과 안양이 펼친 선의의 경쟁이 한국축구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고 평가했다.
'김호의 수원'과 '조광래의 안양'은 99년부터 2003년까지 5년동안 K리그에서 21번을 맞붙어 10승1무10패를 기록했다. 말그대로 용호상박의 혈투였다. 2003년 시즌이 끝난뒤 김호는 수원을 떠났고,안양은 다시 서울로 연고를 옮겨 FC서울로 재탄생했다. 그렇게 K리그에 가장 치열했던 라이벌전으로 기억되는 수원과 안양의 '5년 전쟁'은 막을 내렸다.
◇'1번 국도 더비'의 추억 ◇
그랑블루의 창단멤버이지 지금은 수원에서 프런트로 일하고 있는 이은호씨의 기억은 각별하다. "그랑블루는 국내 최초의 서포터스라는 자부심이 대단했어요. 양질에서 최고라는 믿음이 있었지요. 그러나 늦게 만들어진 안양 서포터스 '레드'에 자극받은 측면도 큽니다. 당시 '레드'에는 예술가 취향의 멤버들이 많았어요. 미대 출신들이 큰 통천에 직접 수작업으로 멋진 그림을 그렸고,밴드 출신들이 락음악풍의 응원가를 만들기도 했지요. 레드의 그런 예술적 취향은 그랑블루에도 신선한 자극이 됐고,두 서포터스가 서로 경쟁하며 발전하는 계기가 됐어요".
당시 수원과 안양을 직접 잇는 버스노선이 없어서 양팀 팬들이 차량을 이용해 이동했는데 1번 국도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양팀 서포터스 사이에는 수원-안양전이 '1번 국도 더비'로 통했다. 이씨는 "아마도 두 팀의 경기가 끝난뒤 조용하게 지나간 적이 한번도 없었을 거예요. 서포터스끼리 크고 작은 뒤탈이 꼭 있었죠. 그래도 두 팀 서포터스는 원래 '붉은 악마'안에서 사이가 좋았던 그룹"이라고 회상했다. 안양이 서울로 연고를 옮긴뒤 두 팀간의 라이벌 의식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지만 '김호의 수원'과 '조광래의 안양'이 붙었을 때의 클래시컬한 맛은 분명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다.
◇수원팬 대부분은 서울을 라이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최고의 경쟁자이자 라이벌이였던 안양을 앗아간 증오의 대상일뿐이죠.
수원블루윙즈 지지자연대 그랑블루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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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패는 북패일 뿐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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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 LG는 GG
난 안양주민으로서 분노했었다고!
그럼요 지탄받아 마땅한 팀이죠